[`크립토 허브` 둘러싼 싱가포르·홍콩의 경쟁]
아시아의 `금융 허브(중심지)`라는 지위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해 오던 싱가포르와 홍콩이 가상자산(크립토)분야에서의 허브를 둘러싼 경쟁에 나서고 있다.
중국 정부가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컸던데다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인해 인재들이 이탈하면서 홍콩의 금융 허브 위상이 약화하자, 싱가포르가 디지털자산과 블록체인을 중심으로 한 금융 허브 구축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주 `싱가포르 핀테크 페스티벌`이라는 민관합동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했던 싱가포르 정부는 그 자리에서 크립토 허브 구축에 대한 의지를 천명했다. 축사에 나섰던 라비 메논 싱가포르통화청(MAS) 중앙은행부문 이사는 "디지털자산에 대해 실험하고, 디지털자산을 실제 경제활동에 활용하는 사례를 개발하고, 디지털자산 거래의 효율성을 높이고 위험을 줄이는 방식을 찾아내는 금융 허브로서의 역할을 싱가포르가 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싱가포르는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이후 가상자산에 대해 적극적인 포용정책으로 수많은 관련 기업들을 유치하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회사인 KPMG에 따르면 지난해 싱가포르의 가상자산 및 블록체인 기업 투자는 1억4800만달러로, 불과 1년 전에 비해 10배나 급증했다. 이는 작년 아시아·태평양 지역 투자액의 절반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또 전 세계 가상자산펀드의 6%가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이는 미국과 영국에 이은 세계 3위로, 스위스와 홍콩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미국 가상자산 거래소인 제미니는 아시아지역본부를 싱가포르에 두고 있고, 최근 미국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인 코인베이스도 싱가포르 정부로부터 가상자산사업 허가를 따낸 바 있다.
아울러 싱가포르 내 1위 은행인 DBS는 독자적인 가상자산 거래 플랫폼을 운용하고 있으며, 싱가포르 정부가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정부 바우처를 디지털 화폐로 발행해 유통시킬 수 있도록 하는 시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본사업이 이뤄지면 싱가포르 정부가 공식 발행하는 첫 디지털 화폐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MAS는 가상자산과 블록체인산업을 건전하게 활성화시키겠다는 목표로, 개인투자자들이 투기적으로 가상자산에 거래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를 준비 중이다. 테라폼랩스가 발행한 스테이블코인 테라UDS와 이를 지원하던 루나 코인 급락에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가상자산 운용사인 쓰리애로우즈캐피털이 파산하는 등 피해가 컸다는 점 때문이다. 현재 개인투자자들에 한해 코인 마진 거래나 레버리지 거래 등을 금지하는 방안을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메논 이사도 "투기적인 가상자산 거래를 차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크립토 허브를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반면 팬데믹 기간 중 싱가포르에 뒤쳐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홍콩은 훨씬 더 적극적이다. 중국 중앙정부 방침에 따라 차단해왔던 개인투자자들의 가상자산 거래를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을 포함한 보다 공격적인 활성화 대책을 추진하고자 한다.
지난주 홍콩 정부는 `가상자산 발전을 위한 성명`을 내놓고 향후 가상자산 전략과 정부의 규제 방향성을 공개했다. 그러면서 특별행정부 입법부에 가상자산 거래 촉진을 포함한 법률 개정안을 이미 발의했다고 밝혔다. 성명에서 홍콩 정부는 "글로벌 가상자산 거래소가 홍콩에서 비즈니스 기회를 모색할 수 있도록 지원할 방침"이라면서 "가상자산 리스크를 완화하기 위해 홍콩 정부는 필요한 규제를 추가하거나 완화하는 방안을 적절한 시기에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폴 찬 홍콩 재무장관도 "글로벌 가상자산산업이 국제 금융 중심지인 홍콩의 위상을 100% 활용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맞춰 홍콩 증권선물위원회(HKSFC)는 새로운 라이선스제도를 도입해 홍콩 당국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거래소들에 한해 모든 개인투자자들이 가상자산에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을 내놓기로 했다. 홍콩통화청(HKMA)도 조만간 스테이블코인 규제에 대한 윤곽을 공개해 규제의 불명확실성을 해소할 계획이다. 아울러 시카고상품거래소(CME)에서 거래되고 있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선물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가상자산 선물 상장지수펀드(ETF)도 처음으로 출시하기 위한 가이드라인도 공개했다.
이런 가운데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이나 디지털산업진흥청 설립 등 우리나라 새 정부 공약은 여전히 답보 상태에 있고, 국내 코인발행(ICO)이나 거래소발행(IEO), 대체불가능토큰(NFT) 활성화 등도 전혀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싱가포르와 홍콩이 벌이는 크립토 허브를 둘러싼 경쟁에서 우리나라만 이처럼 들러리로 전락할 경우 지난 2017~2018년 정부 정책 실패로 인해 놓쳤던 디지털자산분야에서의 도약 기회를 이번에도 무산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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